태그 : 스피드레이서
1. 옛날 이야기 한 토막
10년도 전에 지나거숀과 제니퍼 틸리가 방안가득 널어 놓은 지폐 한 장 한 장을 드라이어로 정성스레 말리는 시퀀스를 보면서 "이 감독녀석들은 정말 어느 장면이라도 재미있게 연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감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헐리우드 대형스튜디오의 영화제작 시스템이란 우리나라완 틀려서 원칙적으로 감독에게 편집권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인정받아 편집작업에 깊게 관여하도록 허가 받은 소수가 존재할 뿐입니다. 2000년 이 후의 리들리 스콧이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거장 혹은 천재를 비롯해 "편집 이렇게 하면 관객 돈 뺏어먹을 수 있다"의 비법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는 캡틴 베이 정도가 이런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워쇼스키 형제는 이런 저런 이유로 데뷔작부터 이런 권한을 암암리에 인정받아왔습니다. 제작 파트너인 조엘 실버가 형제를 자신의 양아들인양 신뢰하고 있다는 면도 크겠지만 두 번째로는 그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상당히 특이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스릴러물인 "바운드"에서 가위와 옷장과 묶인 두여자를 가지고 풀어내는 클라이맥스의 시퀀스를 보면 정말 이 형제들의 머리 속에 있는 이야기방식이랄까 편집계획이랄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입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경우는 여기에다 "범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라는 요소까지 더해져 형제 외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야기 얼개에 손을 댈 수가 없는 상황 마저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매트릭스 삼부작"이라는 "세기의 오덕질"을 위한 스튜디오의 자금을 빼먹기 위해 제작한 독립영화 "바운드"때 부터 1억불짜리 스튜디오 블록버스터 "스피드 레이서"까지 언제나 편집은 잭 스텐버그라는 같은 사람에게 맡겨온 것 자체가 그들의 재능과 그 재능에 대한 스튜디오 시스템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워쇼스키 형제는 정말 탁월한 이야기 꾼입니다.
2. 지겨움으로 복수해 주마
스피드 레이서가 로열튼 회장 집무실로 들어 옵니다. 손에는 갈색 종이봉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디다스 광고 풍으로 "내 이름은 스피드 레이서 내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 이러면서 왜 로열튼과 계약할 수 없는지 한참을 이야기 합니다. 듣고 있던 회장은 가식의 미소를 벗어버리고는 회충이 나온 분뇨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날 지겹게 만들다니 너도 한 번 지겨운 이야기를 들어보거라" 이러더니 스피드에게 마찬가지로 지겨운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피해를 보는 것은 객석의 관객들 입니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스피드와 아버지가 소중히 가지고 있는 "추억"이 결국에는 세상의 "추악함"으로 드러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화의 파국에서 응징되어야 하는 악당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왜 저렇게 재미없게 연출할까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화면은 현란하게 돌아갑니다. 전통적인 러시안스타일과 테리길리엄 스타일의 컷아웃 애니메이션이 디지털로 비빔밥이 된 것같은 시퀀스가 펼쳐지면서 "야 쫌 재미를 느껴봐봐~" 이러는데 전혀 감흥 없고 "레이스는 언제하지?"라는 생각 뿐입니다.
스피드 레이서의 가장 큰 문제는 유치함이 아닙니다. 세상에 주인공이름이 "스피드레이서"고 형사 이름이 "디텍터"며 10분에 한 번 씩 커플룩으로 맞춰입은 침팬지와 과체중 어린이가 나와 이종간 만담을 보여주는 영화를 보면서 "유치함"이외의 다른 걸 기대하면 안되죠. 스피드 레이서의 유치함은 경쾌함입니다. 그쪽말로 표현하면 "캠피"함 입니다. 그건 스피드 레이서를 규정하는 "미덕"입니다. 스피드레이서의 장점입니다. (참고로 침침과 스프라이틀이 나오는 장면은 다 좋았습니다.심지어는 똥개그도 좋았습니다.) 아니 싸우는 장면에서 6~70년대 초당 6~7프레임짜리 일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에서나 (혹은 드래곤 퀘스트 하느라 배경그릴 시간이 없어서 대충 때운 토가시 요시히로의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집중선이 나오는 영화에서는 유치함은 또 다른 재미요소일 뿐입니다. 그건 리 마리오의 의도적으로 과장된 느끼함 같은 겁니다. 그냥 대인배다운 마음으로 함께 웃으면 되는 겁니다. 그들이 매트릭스 때부터 심지어는 "브이포벤데타"에서도 이야기하는 60년대 히피적 정서인 "엿먹어라, 기득권(Stick it to the man)"의 정서를 유지하고 있는 전체 이야기 역시 잘못된 점은 없습니다. 적당히 선동적이고 적당히 카타르시스적입니다. 주인공과의 감정적 동화나 액션시퀀스를 보면서 어느 한 편에 몰입해서 응원하기 위한 적당한 정서적 배경설정입니다.
정작 이 영화의 심각한 단점은 경주가 멈추면 영화도 멈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건 어쩌면 후반 5분의 액션을 보기 위해 20분의 지겨움을 감내하는 TV시리즈 만화의 특성을 그대로 스크린에 재현하기 위한 그들의 의도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중요한 건 현란한 비쥬얼 속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조차 묻혀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영화는 그 자체로 "주객전도"의 사전적 의미를 시연하고 있습니다.
3. 화가라기 보다는 건축가
워쇼스키 형제는 팀버튼이 아닙니다. 그들은 타셈 싱이 아닙니다. 그들의 "탁월한 비쥬얼 감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의 장점은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적 수단을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니오의 궁극적인 매트릭스의 콘트롤을 보여주기 위해 불릿타임이라는 테크닉을 만들어 낸 것 처럼 말이죠.
스피드레이서도 이런 식의 "서사를 위해서는 물리법칙 따위는 개나 줘버려"하는 특이한 시도가 자주 보입니다. 앞 차와 뒤차의 대화를 하면서 카메라가 한 컷 내에 앞뒤 차의 드라이버 얼굴을 번갈아 줌인 줌아웃 하는 시퀀스는 상당히 특이하고 유쾌했습니다. 첫번째 레이스에서 "형의 고스트"와 경주(사실은 타임어택)를 벌이는 모습은 비디오 게임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다층적인 감동이 느껴지는 표현이었습니다. 거친 "카-푸"를 보여주기 위한 스트레치 슬로우모션의 사용 등 영화 전체의 레이싱 시퀀스는 상당히 능숙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확실히 프리프로덕션에 강하기에 포스트에서 열매맺는 워쇼스키 형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색의 사용 같은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 있어서 스피드레이서가 성공했는가 하는 점에는 커다란 의문이 듭니다. 색깔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폭발연 조차도 알록달록합니다. 붉은 색조가 감도는 사막에서 차가 구르며 만들어 내는 정말 만화같은 오렌지색의 모래먼지 덩어리가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장면은 감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스피드 레이서가 언제나 입고 나오는 파란색의 셔츠의 색조도 잘 뽑혔습니다. 하지만 로열튼 공장의 장면 그리고 90년대 금성 테크노피아 광고를 연상시키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도시풍경의 색채는 아트부가 800번쯤 고치다가 죽(粥)을 만들어 놓은 느낌입니다. 기본적으로 보라색과 초록색으로 이뤄진 리얼 스트릿 레이싱의 투톤 메탈릭의 느낌을 밑색으로 했는데 여기에 아니메 느낌의 스트레이트한 색깔이 주요 시각모티브로 등장하기 시작하니 어울리지 못하고 서로 뭉치는 느낌이 듭니다. 사뭇 야심차게 도전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한 미대3학년생의 디자인과제 처럼 보입니다.
4. 다음 이야기
워쇼스키형제가 이 영화로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물론 그 대부분이 독창적인것이라기 보다는 다른 매체를 영화적으로 "전이"(혹은 번역)한 것에 불과하긴 해도. 그 걸 이렇게 뻔뻔하게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감독들이 몇이나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영화적으로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는 "스피드레이서"라도 단순히 헐리우드의 "헛돈지랄"로 치부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형제들이 본인의 능력을 자신들이 좋아하는 "서브컬쳐"의 메이저화에 쏟아 붓는 것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이만한 재능이 있는 감독들이 장르에 대해 보여주는 애정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원작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는 제스쳐마다 아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배타적 공감을 만들어 냅니다. 랠리마지막 차에서 내리면서 원작의 오프닝의 하차장면을 재현하는 모습이나 마지막 크레딧 시퀀스 알리 디에 의해 변주된 스피드 레이서의 테마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도 기본적으로 영화가 스토리텔링의 매체라는 점에 충실할 때만 빛날 수 있겠죠. 특히 그 점에 대해 강한 재능을 보여준 바 있는 워쇼스키 형제가 현란함을 과시하느라 제풀에 흥분해 말더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참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소위 매니아 컬쳐의 팬덤의 배타적 공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스피드레이서" 역시 부분적으로 빛나는 영화인 건 사실이지만 전체적인 모습마저 좋게 평가하기 위해선 상당 부분의 결점에 대해 심하게 능동적으로 눈을 감아줘야하는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 by | 2008/05/12 15:23 | 영화라는 쾌락 | 트랙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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