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미움으로 움직인다.

붉게 칠한 종이 낫과 녹색 방충망의 조화는 크리스마스를 연상시킨다. [사진출처: 경향닷컴]

그들이 말하는 예전이 좋았다는 이야기는 예전의 삶이 경제적으로 더 윤택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그레코 로만 신화가 그리는 사라져 버린 황금시대에 대한 침통한 상실감이나 
기독교 신화가 전해주는 옛날 신성과 가까웠던 시절 사람들은 키가 3미터가 넘었었고 900살도 넘게 살았었다는
그런 허구로 치부해선 안된다. 실제로 예전은 그 분들에게 더 좋았었다. 

사회가 어떠했든 간에, 누가 대통령이었던 간에 비록 지금 보다는 못 먹고 못살았었을지라도
때 되면 발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분들에게 그 시절은 지금보다 백만배는 낫게 느껴질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착각일지언정 스스로가 경제주체라는, 부양자라는 신념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초라한 피부양자로 전락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에겐 얼굴이 없다.
시간을 탓할 수는 없다. 시간에게 화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한탄을 이런 식으로 생물학적 젊음에 대한
일반적 질투만으로 축소 시키는 것 역시 온당하지는 않다.
그들이 봄날의 꿈처럼 회상하는 "좋았던 시절"엔 모든 것이 분명했었다. 그들은 그 분명함이 그립다. 
그 분명함의 핵심이었던 "함께 하는 분노"가 그립다.

사랑, 애정은 개개인의 삶의 방식과 역사를 규정할 수 있지만, 결코 그 규정은 집단을 오랜지배하고 유지하진 못한다. 
어릴 적엔 함께 몰려다니면서 어떤 미소년을 위해 형광봉을 흔들 수 도 있지만 그건 한 때일 뿐이다.
사랑은 어떤 유대를 한 세대 이상 유지 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 위인이든 연예인이든 사랑이 바래지 않는다해도
결국엔 각자 홀로 존경하고 각자 홀로 사랑하게 된다. 집단을 오래 동안 유대하게 만드는 건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증오는 다르다. 

증오는 한 세대를 규정하는 걸 넘어서 세습마저 된다. 세대를 넘고 세기를 넘고 밀레니엄을 지배하기도 한다.
사회의 건강을 재는 척도가 집단으로서의 결속력이나 공동의 추진력이라면 "분명한 공적(共敵)"이 있는 사회가
가장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칠 수 있음"은 모든 것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놈들보다 더 잘사는, 놈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공통의 힘을 기르기 위해 한 손엔 칼을 들고 다른 손엔 코란을 들고 
달려간다. 사랑의 종교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종교도 사랑만 가지고 유지 할 수는 없기에 이교도를 태우고 마녀를 태우고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지금도 어디에선 사찰이 불타게 해달라고 빌고, 우상의 목을 자르면서  집합적인 증오를 배양한다.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늑대와 돼지의 얼굴을 한 "빨갱이"가 있었다. (가끔은 "일본놈"도)
빨갱이에 대한 증오 속에서 80먹은 노인부터 이승복 어린이 까지 갈등 없이 고민 없이 하나가 되었다.
가끔 예외인 녀석들은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타산지석과 일벌백계의 재료로 쓰면 될 뿐이다. 
우리를 하나 되게하는 그 증오는  빨간 색 바늘을 북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의 나침반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버렸고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마치 냉장고 안에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곰팡이가 슬어버린
어머니의 김치를 찾아내듯 이미 고장나버린 증오 메카니즘을 발견한다. 우리를 뭉치게 하던 공통의 적은 더 이상 없다.
젊은 애들은 빨갱이보다는 친일파와 미국이 밉다고 한다. 노동자는 자본이 밉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밉다고 한다.
아내들은 남편의 30년간의 폭력이 밉다고 헤어지자고 한다. 발랑 까진 것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어른들이 밉다고 한다. 
집합적 증오의 대상이 없어진 아이들은 광야를 헤메면서 남의 나라 축구팀, 빌미를 제공한 연예인들, 죄상이 드러난 일반인들,
상대를 바꿔가면서 "휘발성 집단증오"를 즐기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화가 난다.

마땅히 모두가 자기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증오라는 토템"이 산산히 부숴져 버린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일생만큼
묵혀놓은 그 귀중한 유산을 이제 더 이상 후손들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죽을 만큼 화가 난다. 
지난 10년간 벌어진 망측하기 짝이 없는 일들, 양국정상의 악수, 아리랑을 배경음악으로 입장하는 단일팀,
만경봉호 가득 실려온 인형같은 처자들의 표정, 흰 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불경스런 깃발들, 그 속에서 
소중한 흙으로 만든 우상이 씻겨져 녹아내리는 걸 그들은 목격했다.

훼손된 건 단순한 우상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뇌를 공유하며 기름 잘쳐진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는 행복하고 부지런한 국민의 모습이자, 
반공의 수장이신 미국님과의 영원한 유대를 보장하는 강한 고리이며, 자신들이 원조로서 존경받고 대접받아야하는
당위의 증거다. 

그들의 존재이유가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그들은 그 무너져 가는 흉물에 더욱 더 강하게 매달린다. 
증오에 대상 안엔  "집합적 증오"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포함시켜 골조를 보강하고 
더 원색적인 표현으로 치장한다. 
그렇게 예전보다 더욱 조악하게 고쳐진 증오 모형에 복대를 두른 자살 특공대 처럼 매달려
"놈을 파내고 그 자리에 내가 대신 묻히겠다"라고 울부짓는 모습은 목숨이 위태로울만큼
심각하게 상처입은 동물의 마지막 몸짓이다. 버림받고 겁에 질리고 아무 것도 남은게 없는 자의
슬픈 패악질이다. 사회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집단의 결속력이 아니라 구성원에 대한 배려나
구성원의 양식수준이라는 걸 깨닫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멸종 위기의 동물들의 슬픈 유전자다.  

by 액화철인 | 2009/09/11 22:06 | 오욕의 타임캡슐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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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홍월 at 2009/09/11 22:58
사람은 마음으로 움직인단 줄 알고 들어왔군요...멸종시킨줄 알아도, 다시 부활하는게 또 묘미죠.
Commented by 액화철인 at 2009/09/12 00:14
초능력 포스팅인 줄 아셨구나...

글쎄 말입니다. 유전자를 여기 저기 뿌리고 다니는지 어디선가는 싹이 트 더군요...
Commented by 홍월 at 2009/09/12 00:30
초능력ㅋㅋㅋ그건 아닙니다~(~의 힘!)
Commented by oxymoron at 2009/09/12 00:53
오늘도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확실히 불특정 다수를 결집시키는 데에는 증오만한 것이 없지요.
Commented by 액화철인 at 2009/09/12 12:03
괴성과 돌도끼는 형태만 바뀐 채로 반복된다고 그러죠
Commented by 조부 at 2009/09/12 04:38
잘 읽었습니다. 링크 신고드립니다.
Commented at 2009/09/12 10:2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액화철인 at 2009/09/12 12:04
얼마든지 존경스러운 분들도 많습니다.
Commented by Nine One at 2009/09/12 10:25
뭐 저런거 한 두번도 아니고 말입니다.

문제는 증오로 결집시킨 것 까진 좋은데 하려면 재대로 폭탄조끼 둘러매고 김대중 전 대통령 묘지를 파괴하는 과격함(!)도 보여야죠.

하려면 화끈하게.
Commented by 액화철인 at 2009/09/12 12:04
알바비에 위험수당까지 얹어서...
Commented by ellouin at 2009/09/12 18:42
"마땅히 모두가 자기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증오라는 토템"이 산산히 부숴져 버린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일생만큼
묵혀놓은 그 귀중한 유산을 이제 더 이상 후손들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죽을 만큼 화가 난다. "

이 부분이 특히 눈에 잡히네요. 저들의 증오를 지금이라도 조금씩 덜어주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요? 그 증오에 우리는 또다른 증오로 대답함으로써 증오라는 토템이 양상을 바꾼채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도록 방치해야 하는 걸까요? 어렵습니다.
Commented by 액화철인 at 2009/09/14 11:53
음 증오가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전세대의 집단적이고 획일화된 증오는 점차 사라져 가는 듯 해요.
증오가 다양화 되고 소규모화 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또 어느 순간엔 뭐가 나타게 될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Commented by LEILA at 2009/09/19 02:57
IPTV로 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벤자민이 점점 젊어지면서 거울을 보며 아래가 점점 커진다고 가슴에 힘을 주던데..
다시 거꾸로 하면, 사실 늙어가면서 점점 줄어드는 건가요? 나이들면 키도 줄어든다던데..영화본지 얼마 안되서 노인네 보면 궁금해지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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