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17일
진심도 가끔은 이긴다. – “원스”의 오스카 정복기

마르케타: 어머~ 둘 다 남자 잖아!
글렌: 괜찮아, 여긴 헐리우드 거든.
(존 스튜어트의 농담 中)
오스카는 언제나 비슷하다.
허영의 극을 달리는 랜돌프 듀크 영감의 참석자 식전 의상 품평, 사회자의 입을 빌어 쏟아져 나오는 헐리우드의 자기비하적 농담들 (허용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는), 수상자의 연설을 끊어먹는 무례한 오케스트라, 그 모든 친근한 요소들이 올해도 여전히 그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일년 마다 찾아오는 데자부 모듬세트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80회를 맞는 올해의 오스카는 뭔가 특별했다. 가장 특별한 점은 최악에 가까운 시청률이다. “작가파업 끝난 지 겨우 일주일 정도라 시상식 준비가 개판이었다"라는 변명보다도 사실은 올해의 선정작들이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아서라는 쪽이 더욱 설득력있게 들린다. “데어윌비블러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이끌고 있는 진정 "영화적"으로 탁월한 후보작 일군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고고한 군학처럼 느껴진다. 멩겔라 감독이나 만들 법한 대하로맨스풍의 대작 “어톤먼트”가 평범하게 보일 지경이니 사실 2007년은 시네필들에게는 행복한 한 해였음이 분명했지만 그 만큼 “블록버스터”와 “예술 영화(더 좋은 표현이 없어 울며겨자먹기로 쓰자면)”의 양극화가 심했던 한 해였고 그것은 결국에는 시상식 자체가 통째로 외면 받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오스카는 영화를 응원하는 "프로 스포츠 이벤트", 구단의 인기가 리그의 인기를 좌우하는 법이지 않는가.
대중들의 외면과는 별개로 올해의 오스카는 내겐 매우 흡족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나에게만 친절한 "배타성"이 스물스물 배어나오는 것 같아서 땜빵을 위해 준비된 코너들마저 진정으로 영화가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 처럼 느껴졌다. 아주 흡족스러웠다.
그 흡족스러움의 절정은 바로 아이리쉬 캐바람둥이인 콜린 패럴이 단상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콜린은 영화에서는 잘 드러내보이지 않는 고유의 진한 아이리쉬 액센트로 고향에서 온 두 동포 뮤지션을 소개한다. (사실 이글로바는 체코인이긴 하지만, 따지지 말고) 작은 영화를 감싸 안은 척하는 헐리우드의 유별나게 과장된 포용이라는 공적인 입장과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자부심이라는 시적인 입장이 그의 목소리에 묘하게 섞여있다.
드디어 무대가 밝아지고 그들의 노래가 시작된다.
가짜 풍경 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다. 마르케타는 무슨 학교콩쿠르에나 입고 나올법한 촌스러운 하늘 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고 글렌은 입장하다가 보안요원들에게 시비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될 정도의 의상이다. 오스카에 온다고 해서 모처럼 사입었다는 자켓이지만 레드카펫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게다가 구겨진 셔츠와 감색 베스트는 정말 걸쳐입었다라는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랜돌프 듀크가 봤으면 뭐라고 투덜거렸을까?
도레미도 도레파미... 지극히 단순한 멜로디를 기타와 보컬과 피아노가 유니즌으로 흝어 내린다. 글렌의 진지한 눈은 그의 진지한 목소리와 함께 노래하고있다. 심장으로 노래부르는 마르케타의 목소리는 그녀가 긴장한 만큼 그대로 가늘게 떨린다. 그리고 그렇게 코닥 극장은 일순간 아이리쉬 펍으로, 더블린의 악기 상점으로 변한다.
그 환상을 깨우는 것은 스테이지 밑, 빌 콘티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노래의 끝자락, 카메라가 오케스트라를 비추기 시작하자, 그 동안 주변에서 께작거리고 있던 오케스트라는 누가 볼 때만 일하는 공무원처럼 바빠지기 시작한다. 멕시코인이 운영하는 종교용품 상점에서 판매하는 1000원에 세 개 짜리 "천상의 나팔" 같은 금관 섹션의 빵빠레와 공연 내내 소심하게 아르페지오 뜯는 척하고 있다가 걸작에 숫가락 하나 올려놓아보겠다고 뒤늣게 상행 스케일을 "초당10타 싸대기"처럼 날리는 하프의 연주로 드디어 공연은 마무리된다.
아 좋다.
"Falling Slowly"는 원래 엄밀하게 따지면 오스카에 나올 수 없는 곡이다. 애시당초 "원스"라는 영화를 위해 작곡된 곡이긴 하지만 영화보다 먼저 발표가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2006 영화 제작비가 모자라 포스트 프로덕션이 무한연기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자, 다시 말해 영화의 완성조차도 걱정되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2006년에 Frames의 6집과 커플만의 특별 프로젝트 음반에 이곡을 수록하는 소위 영화 살리기 "앵벌이"를 감행한다. 그리고 영화는 2007년 따듯한 봄날에 되어야 개봉된다. 이것은 영화를 통해 최초로 발표되는 곡만을 후보로 선정하는 규정에 어긋나는 심각한 결격사유다. 하지만 개봉은 커녕 완성 조차도 의심 받는 상황에서 "오스카 출품자격 여부" 걱정 따위는 꿈에도 할 수 없던 그들이었다.
영화예술아카데미의 규정에 대한 엄청난 집착은 올해 유달리 심했다. 그래미와 골든 글로브 영화음악을 휩쓴 에디 베더의 "Into the Wild" 사운드 트랙,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쟈니 그린우드의 "데어윌비블러드"의 사운드 트랙이 "기존 멜로디의 편곡"이라는 진짜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오리지널 스코어"부문에서 탈락되게 되는 그야말로 꼴통스러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들의 태도에 "원스" 역시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원스"의 노래 앞에서는 영화예술아카데미의 태도는 전향을 넘어서 편애에 가까운 모습을 취한다. "어차피 마이너 수준에서 발표되었을 뿐"이라는 둥, "결국 영화를 위해 쓰여진 곡이 라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둥 적극적인 변명을 해주면서 "규정 따위는 개나"라는 "스코어" 후보 선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연성을 보여주는 그 순간 부터 사실 "원스"의 수상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례적인 배려 때문에 시상식 당일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은 "원스"가 가져 갈 것을 예상하고 있다.
정작 예상하지 못하는 건 눈치 없는 글렌과 마르케타 커플 뿐.
비슷한 일이 선댄스 때도 있었다. 동절기 장비도 변변치 않은 이 가난뱅이 커플은 아스펜의 추운 스키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선댄스"에 초청을 받아 진짜 그야말로 떨레떨레 갔었다. 하지만 취재진과 스타들로 북적이는 인디영화 최고의 축제의 부산함과 소란스러움에 질려버려 이틀만에 "저희 집에 갈래요"라고 주최측에 이야기했더란다.
그 때 주최측은 이례적으로 "좀 더 있으세요 폐막식 때까지 각종 편의 제공하께"라고 이 커플을 붙잡아 놓았다.
남들 같으면 충분히 알아먹었을 힌트였다.
그래도 이들은 자신들이 선댄스 폐막식에서 "관객상"이라는 큰 상을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눈치 못했다고 한다.
존 트라볼타가 단상에 올라설 때만 해도 글렌의 머리 속에는 친구들에게 사줄 선물을 빼먹은 게 없는 가 라는 생각 뿐이었다.
'밴드 친구들에게 "다스 부트(한국명 유보트)" DVD를 하나씩 사주자. 남자들 끼리 오래 부대끼는 사이엔 이 영화만큼 공감 가는게 없으니까. 근데 몇 개를 사면 되더라?'
존트라볼타는 봉투를 뜯기전 부터 알았다는 표정으로 "당연하게도" 그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복도 쪽 좌석에 앉아있던 글렌이 놀라서 얼굴을 감싸쥐고 일어난다. 마치 남자친구만 수상한 것 처럼 "야 축하해"라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던 마르케타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다.오케스트라는 엘리베이터용 경음악풍으로 편곡된 낯설기 짝이 없는 "Falling Slowly"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글렌이 효도 관광차 모시고 온 엄마는 마르케타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글렌을 포옹한다. 그 포옹사이로 마르케타가 쭈삣거리며 빠져나와서 글렌을 본다.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엄마에게 아직도 붙잡혀있는 글렌, 포옹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 나 가야되요." 글렌이 말한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마가 말한다 "아냐 아냐 아냐."
아직도 포옹은 풀지 않은 채로...
"엄마 진짜 나 가봐야 해요"라고 글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엄마를 떼어 놓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세발자욱 정도 앞서있던 마르케타 역시 글렌이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 글렌은 주먹을 쥐고 객석에 앉아 있는 스타들을 향해 흔들어 보인다.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에 걸려넘어지지 않도록 마치 도망가는 신부처럼 치마자락을 올려잡고 있던 마르케타는 글렌이 잘 쫓아 오나 한 번 뒤를 돌아본다.
"탱스"
진한 아이리쉬 액센트의 영어로 고맙다는 말,
"고 라입 마이스 아곳 (go raibh maith agat)"
'당신 고마워요'라는 의미의 아일랜드 말,
이렇게 자체순차통역서비스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글렌의 수상소감은 시작되었다.
" 고맙습니다. 굉장한 걸요. 우리 여기서 뭐하는 거지? 와 완전 미친거에요. 우린 이년전에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핸디 캠 두대로 찍었구요. 3주 걸려서 만들었습니다. 한 십만불 정도 들었죠. 이런 장소에 와서 여러분들 같은 사람들 앞에 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그동안 너무 놀라웠어요. 이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전부. 정말 우리에겐 큰 의미라구요. 아카데미에게 감사 드리고 우리를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누군지 말안해도 아시겠죠? 누군지 일일히 이야기하진 않을께요. 굉장합니다. 예술을 만듭시다, 예술을. 감사합니다. (Thanks! This is amazing. What are we doing here? This is mad. We made this film two years ago. We shot on two Handycams. It took us three weeks to make. We made it for a hundred grand. We never thought we would come into a room like this and be in front of you people. It's been an amazing thing. Thanks for taking this film seriously, all of you. It means a lot to us. Thanks to the Academy, thanks to all the people who've helped us, they know who they are, we don't need to say them. This is amazing. Make art. Make art. Thanks.)"
시간을 많이 빼앗지 않기위해 밴드 멤버들이야기도, 존 카니 감독이야기도, 더블린 병원에 누워 중계를 지켜보고 있을 아픈 아버지 이야기도 모두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로 종합해버린 글렌은 마이크를 여자친구에게 넘긴다.
그런데 그 때
무대의 상황을 보면서 오케스트라에게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하는 무대감독은 무대를 보고있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굵직한 상들의 순서를 막판 체크하기 위해 자신의 큐시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글렌이 마지막으로 "땡스"라고 하는 순간 빌콘티에게 수신호를 보내버린다. 무대에서는 마르케타가 마이크 앞에 막 서려고 하는 참이었는데 말이다.
야속한 "어서 내려가Song"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마르케타는 살짝 실망한 눈 빛으로 쪼르르 무대 뒤로 사라진다.
이 모든 상황을 콘솔박스에서 보고 있던 베테랑 프로듀서인 길 케이츠의 행동이 재빨라진다. 무대 스태프에게 지시를 내려 뒷문을 돌아 객석으로 돌아가려는 마르케타를 제지하고, 사회자 존 스튜어트에게 헤드셋을 통해 이야기한다. "사고로 끊겼다. 이렇게 그냥 내려 보내지 말고 다시 소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겠다."
광고시간이 끝나고 존 스튜어트는 다시 마르케타 이글로바를 무대로 불러낸다.
오스카 시상식 사상 가장 잔혹한 순간으로 남을 뻔했던 사건이 오스카 시상식 사상 가장 훈훈한 미담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이례적이고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된 마르케타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의 뮤즈 같아 보였고 그녀의 소감 역시 뮤즈가 할법한 이야기였다.
"안녕, 여러분.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디 음악인들 그리고 고생하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말이죠.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오늘밤 여기 서있다는 사실, 우리가 이 트로피를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꿈이 황당한 것일지라도 가능하다는 증거에요. 용감하게 꿈꾸는 사람들에게 기회는 오는 거니가 포기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 노래는 희망의 관점에서 씌여졌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르던 간에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감사해요. 우리를 그동안 도와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Hi everyone. I just want to thank you so much. This is such a big deal, not only for us, but for all other independent musicians and artists that spend most of their time struggling, and this, the fact that we're standing here tonight, the fact that we're able to hold this, it's just to prove no matter how far out your dreams are, it's possible. And, you know, fair play to those who dare to dream and don't give up. And this song was written from a perspective of hope, and hope at the end of the day connects us all, no matter how different we are. And so thank you so much, who helped us along way. Thank you. )"
수미쌍관처럼 객석에 앉아 감격해하는 로라 리니의 얼굴 클로즈업이 수상의 앞 뒤를 장식했다. 헐리우드가 스스로 잊고 있던 "진심"이라는 가치에 감동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표정이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qx8yLvb0gZM&feature=related
# by | 2008/03/17 18:25 | 영화라는 쾌락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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