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10일
어거스트 러쉬: 이 영화에서 나는 모 대선후보의 향취를 느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에 나오는 고유명사들은 전부 작가의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실존하는 지명이나 단체명이 있다고 해서 헷갈리면 곤란하다. 여기 나오는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는 고담, 메트로폴리스, 중간계, 나니아 처럼 완벽한 픽션의 공간이며 이 영화에 나오는 줄리어드 음대나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역시 “건담마이스터”나 “제다이기사단”처럼 완벽한 픽션의 단체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이 황당무계하기 서울역 앞에 그지 없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심각한 애로사항이 있을 수 있다.
영화의 전체 스토리라인은 기본적으로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이야기들의 물리적 합성체다. 기본적으로는 찰스 디킨스의 걸작 “올리버 트위스트”의 뼈대에 모든 갈등이나 플롯이 주인공의 천재성에 무책임하게 의존하고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일본만화풍의 천재이야기”를 섞어 놓고 이걸 현대라는 배경으로 옮겨 놓은 이야기다. 아니 사실은 현대도 아니다. 이건 영국도 미국도 아니고 중간계도 아니다. 이건 감독과 작가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다. 모든 것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을 대체하는 상징이나 현상의 시뮬레이트에 불과하다는 말로 개연성의 심각한 결여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시작해야하는 영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영화는 부모를 찾아가는 소년의 모험을 그린 동화적 환타지라는 것이다.
일단 주인공이 겪는 역경은 사실 “음악에 대한 탄압”이라고 나레이션으로 이야기 된다. 말하면 이루어지는 동화 속 세상은 정언(定言)이 중요한 세계다. 주인공의 적들은 “희망도 없고, 음악도 없다”는 걸 말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그 걸 인정 못하는 주인공은 장대한 퀘스트를 시작한다. 주인공은 왜 그런 역경에 처하게 되었을까?
주인공을 고아원에 밀어 넣어야 이야기가 되는 제작진은 “신분차이”라는 고전적인 모티브를 차용한다. 하층민인 아이리쉬 포크라커인 남자와 상류층인 클래시컬 첼리스트 여자의 사랑은 하룻밤 만에 아이를 잉태시키고 끝나게 된다. 끝나는 이유는 한가지 여자가 낳은 애가 고아원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고 이뤄질 수도 있던 수 만 가지 대안 따위는 소용없다. 무조건 아이는 고아원에 들어가야 하니까. 이뤄지지 않은 사랑의 증거는 교통사고와 과잉보호 아버지 이 두가지를 사용해서 무사히 고아원으로 보낸 감독은 이제 부모를 음악시장에서 은퇴시킨다. 은퇴 시켜야 둘이 10년 동안 못 만날 것이고 아이는 10년 동안 고아원에 있게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남자는 “노래를 불러줄 대상이 없는데 뭐 하러 음악을”이러는 이유로 음악을 관두는 걸로 하고 여자는 아이를 잃은 상심으로 연주자에서 지도자로 2선후퇴를 하는 걸로 한다. 주인공의 배경이 설정된 과정들이 어찌나 제작자 멋대로인지 마치 나이트에서 감기약 탄 싸구려 위스키를 먹고 비몽사몽간에 강간당하는 느낌이었지만 이 시점까지도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해줄 준비는 되어있었다. 감독 크리스틴 쉐리단이 아일랜드 인이라는 점과 젊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본인의 실력보다는 휠씬 더 좋은 감독인 것처럼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샐리 포터 같은 인물이라는 것은 킬리언 머피 같은 좋은 배우 데려다가 부산 자갈치시장 아지매집 누렁이 밥그릇에 담겨 있는 개밥을 만들어 놓은 그녀의 전작 “디스코 돼지들”을 보고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정도 셋업에서 동화적인 이야기를 대충 풀어주면 좋다고 생각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파긴”을 그대로 (게다가 “아트풀 다져”까지 셋트로) 베껴 놓은 로빈 윌리엄스의 “위자드”라는 캐릭터가 리허설에 난입해 “나는 니 이름을 알아, 럼펠슈틸스킨”라는 식의 어거지를 부리는 것도 “일단 주인공에게 위기가 나올만한 때니까 위기 한 번 만들어보려고 하니까 함 믿어주세요 네?”라는 감독의 빤한 의도가 느껴졌지만 이 영화 동화니까 정언(定言)이 중요한 것이겠지 라면서 이해해 줄 수 있었고 마지막 어떻게 해서든 이제까지 나온 인물 전부 다 피날레에 몰아 넣으려고 헐떡거리는 감독의 삽질 역시 “일본만화”에선 얼마든지 가능한 설정 이러면서 이해해 줄 수도 있었다.
음악만 좋았다면 말이지.
이 영화는 확실히 음악을 모르는 인간들이 음악이 중심이 되는 영화가 아니라 도구가 되는 영화로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게 커다란 죄는 아니다. 음악을 아는 사람만이 영화를 만들라는 법은 없으니까.
음악을 잘 모른다는 것은 바로 어떤 음악이 좋은 음악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세리단 감독은 자신이 음악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제프 폴락 같은 잘 알려진 음악 컨설턴트의 도움도 열심히 받았다.
어거스트 러쉬의 자유롭고 천재적인 음악에의 접근법을 보여주기 위해 기타 플레이에 프렛태핑주법을 사용한 것은 그야 말로 제프 폴락이 생각해낼 법한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물론 그것 역시 제대로 실행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처음 버려진 극장에서 기타를 프렛태핑을 하는 장면의 처음은 괜찮았으나 갑자기 연주가 점점 누군가를 닮아간다. 이게 누구더라 마이클 헤지스? 프레스톤 리드? “엑? 캐키킹?!!!!”
최소한 영화를 위해서라면 어거스트 러쉬의 연주라는 형태를 만들어 보여줘야 한다. 인물 설정에 적합한 스타일이 나와야 한다. 갑자기 애가 천재적인 연주를 하는 건 좋은데 갑자기 하는 연주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유명한 연주자의 카피가 나와서는 무척이나 곤란하다는 거다. 세상에 캐키킹의 스타일이 얼마나 독특한데 어거스트 러시가 갑자기 캐키킹을 독창적인 척 카피하면 어쩌자는 거냐는 거다. 예를 들자면 천재 화가에 대한 픽션을 만들었는데 한 어린 화가가 붓잡은지 3일 만에 그려내는 그림이 전부 고호의 그림이더라 이러면 영화가 얼마나 깰지 상상이 가는가? 이건 음악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어거스트 러쉬만의 연주, 부모가 그리운 기타에 대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는 어떤 식으로 연주할 까라는 고민이 없었고 그냥 캐키킹 가져다 쓴 것 밖에 안되는 거다.
조나단 리즈 마이어스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아이리쉬 포크락 역시 가짜스럽다. 아이리쉬 포크락이 화려함 때문에 사람을 울리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건 진심 때문이다. 돈 주고도 못사는 진심 때문이다. 이 영화의 노래들은 일견 비슷하게 들리긴 해도 마치 뽄드를 물에 타서 흰 종이에 발라 만든 가짜 나전처럼, 톱밥을 빨간 물 들여 만든 가짜 고추 가루처럼 공허하고 쉽게 잊혀진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즈의 신뢰감 100%의 비쥬얼이 대충 메꿔주기를 기대하는 가장 성의 없는 작곡의 사례되겠다. 이 영화에서 조나단 리즈 마이어스가 부른 노래 중 가장 들어줄 만한 노래는 결국 밴 모리슨의 “문댄스”커버 정도 (옥상에서 흥얼거리는) 라는 사실은 참으로 암울한 거다. 그러나 그래도 이 가짜 아이리쉬 포크락은 그나마 영화에서 나은 부분이다. 진짜 씻을 수 없는 화학폐기물 수준의 음악은 바로 영화의 피날레에 울려퍼지는 “어거스트의 랩소디”다.
처음 이 음악이 나오자 “뭐야 이거! 저 꼬마애 존 테쉬였어?”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존 테쉬”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엔터테인먼트 투나잇”의 아니운서 출신으로 짝퉁 야니를 꿈꾸는 피아니스트/오케스트레이터/어레인저다. 그의 음악은 화려하고 발랄한 선율에도 불구하고 그 단조로움과 진부함에 듣는 이 모두 정신 줄을 놓게만든다는 전설의 음파무기다. 마크 맨시나가 1년 반을 낭비해서 만들었다는 이 곡은 독일 지멘즈社의 홍보부서가 인류에게 저지른 끔찍한 죄악인 모 협주곡을 방불케하는 막가파류 퓨전 스코어로 이것저것 써가면서 갈대밭을 흔드는 바람부터 지하철역의 질주까지 이르는 영화전체의 내용을 친절하게 단락별로 음악을 통해 다시 리플레이 해준다. 이 영화를 끔찍하게 여긴 사람에게는 한자리에서 영화 두 번 보여주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잔인한 고문이겠지만 그냥 오케스트라 울려주고 흑인 여자애 소리 질러주고 스텀프 류의 쇳덩이 타악기 두들겨주고 클래식과 팝 적당히 섞어주고 그럼 막 감동 느끼는 순진한 관객들에게는 마냥 즐겁고 울컥할 수도 있다.
마지막 곡의 성의 없음은 끝까지 이어진다. 공연이 끝났는지 어땠는지 그냥 막판 연주음악은 영화 끝까지 달려나간다. 아무도 음악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화면상으로 보면 연주가 끝난 거 같은데 음악은 페이드 아웃까지 이어진다. 그래 누가 신경쓰겠냐. 어차피 음악이 중요한 거 아니잖아. 뭐 부모자상봉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근데 이거 음악 영화 아니었어?”라고 묻는 관객들이 있다면 이게 음악영화라면 영화 내내 고작 “음악은 세상 곳곳에 있으니 마음을 열면 들린다”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에만 매달리겠습니까 라고 되묻고 싶다. “카핑 베토벤”역시 비슷한 메시지로 끝나지 않았나? 이 이야기는 마치 “음악 뭐 별거 있어?”라는 것처럼 개념없이 들린다. 아니 화가 난다.
도대체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변명처럼 느껴지는 “자기가 들어서 좋으면 좋은 음악”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이야기에 화가 나는 거다.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상대주의적 생각의 가닥”은 이야기 하는데 마음으로부터 짜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산꼭대기로 상하체가 분리되어 쓸려가는 느낌이다. 라따뚜이의 레미도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 “모두가 요리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요리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그걸 무시한 결과는 지금 마요네즈와 우유에 밥을 말아먹는 “총체적 미각장애의 세대의 탄생”으로 나타나고 있지않느냐고. “어거스트 러시”는 그런 재앙의 징후에 다름 아니다.
붙임 1.
내가 화가 나는 건 이 영화가 “음악”을 빙자한 기획상품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음악”을 빙자한 기획상품이 아닌 척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획상품의 질도 불량스럽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는 (언제나 재능보다는 포장가능한 이슈를 찾아 영화를 제작하는 썩어빠진 정신머리의 제작사) 사우스포 제작에 워너브라더스가 배급하는 메이저 영화다 그런데 인디영화인 척 크리스텐 세리단을 감독에 앉혀 놓고 아이리쉬 포크인 척하는 미국 음악인들이 만든 곡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서 마치 요즘 대세인 “위장”을 몸소 실천하는 듯하다. (아! 그래서 현재 인기가 높군요)
붙임 2.
“원스”를 보고 든 두려운 상상 중 하나는 헐리우드 메이저들이 저 “원스”의 에너지를 어떻게 베껴먹을까라고 계산기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그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현실화 되냐?
# by | 2007/12/10 16:44 | 오욕의 타임캡슐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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